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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영화 이야기 [ 박 열 ]


박상언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23일
ⓒ 속초양양인터넷뉴스
영화 박열


요약 : 한국 | 시대극 | 2017.06.28 개봉
감독 : 이준익
출연 : 이 제훈, 최 희서, 김 인우, 권 율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아나키스트 사랑

독립투사 '박열'의 삶을 먼저 얘기합니다. 1902년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큰 충격을 받습니다. 국민학교 조선인 선생님이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교육을 하고 있음을 반성하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그 후 고교 시절에는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을 당했습니다. 그 길로 일본에 넘어가서 노동과 허드렛일을 하며 유학을 시작합니다. 박열이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사회주의 등의 제국주의 반발 세력과 '흑우회', '흑도회'를 조직하면서부터입니다.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은 더욱 극적입니다. 아버지는 이모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버리고 어머니도 여러 명과 바람을 피웠습니다. 조선에 와서 고모 집에 잠시 지내기도 했는데 할머니에게 학대를 받았으며, 마침 터진 3.1 운동을 통해 독립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 후에도 신문팔이, 식모살이, 노점상으로 힘들게 살았는데, 영화 박열 줄거리에서 나오듯이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는 그에게 동거를 제의합니다. 박열 영화 실화 중 일본에서의 동거는 이렇게 된 것입니다.

​영화 박열 실화에서의 두 사람은 더욱 극적입니다. 두 사람이 아나키스트로서 동거에 들어가며 "동거 서약"을 쓰는 장면이 영화 박열 줄거리에 나오는데, 실제로 "나는 당신에게 동거를 제의한다. 첫째, 우린 동지로서 동거한다. 둘째, 운동 활동 중에는 여성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셋째, 한쪽이 타락하면 그만둔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아나키즘'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습니다. 이는 조선인을 불량하다고 말하는 일본인을 비웃기 위한 이름입니다.

이들은 낮에는 힘겨운 노동일을 했고 밤에는 평등사회를 위해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활동을 했습니다. 조선의 독립을 주장했으며 몰래 폭탄을 제조하거나 수입을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1923년 '간토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이들의 운명이 달라집니다. 일본은 대지진으로 민심이 나빠지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며 뒤집어씌우고 무차별 학살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약 6천여 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으니, 잊어서는 안 될 역사이기도 합니다.

일제는 간토 대지진을 핑계로 조선인과 사회주의자 등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동지들이 잡혀 들어갔습니다. 일제 정부는 간토 대지진을 덮을만한 대형 사건을 터트려서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 희생양이 바로 박열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지들에게 모진 고문을 해서 허위자백을 받아내고, 폭탄을 준비한 이유가 일본 왕을 암살하기 위해서였다고 꾸며댔습니다. 영화 박열 실화를 알아본다면, 날조된 사건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열혈 독립투사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어떤 때는 묵직하게, 어떤 때는 미친 듯이 행동하며 관리들을 애먹였습니다. 이때 일본인 변호사를 만나게 되는데, 영화 박열 결말까지 나오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실존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인권변호사이며 조선에게 평화를 주어야 아시아의 평화도 찾아온다고 생각한 인물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양심, 한국에서는 독립유공자로 기록될 사람입니다.

형식 상일뿐이지만 재판이 열리고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대역죄"로 재판을 받는데 당당히 조선 전통 옷을 입고 나타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조선인이니 조선말로 재판을 받겠다며 통역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영화 박열 줄거리에서 벌어진 대단한 배짱은 모두 사실이라고 합니다. 예상대로 이들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는 "만세!"를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사건은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이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계기도 되었지만, 옥중 사진도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의 주선으로 옥중에서 정식으로 혼인신고를 했습니다. 박열은 가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싶다며 판사에게 기념사진 촬영을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갑자기 여유만만하고도 다정한 포즈를 취했습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대역 죄인에게 이런 사진을 찍어줬다며 난리가 났고, 결국 판사는 해임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박열과 ‘후미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화 박열 결말에서 ‘가네코 후미코’는 자살을 한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후미코’의 사체 인도와 부검 면담마저 거부되었기 때문에 자살인지 아닌지 의문이 남는 죽음입니다. 양심적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후미코’의 시신을 비밀리에 거두어 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22년 후 박열은 석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6.25 전쟁 중에 납북되었고 북에서 사망했습니다.

영화 박열 실화 이후의 가려진 사실들도 있습니다. 박열이 옥중에서 일본을 찬양하는 발언을 하며 친일자로 전향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직 의혹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실화에서 박열은 광복이 될 때까지 감옥에 있었고 이런 발언을 한다고 해서 얻을 것이 별로 없었으니 말입니다. 또한 박열의 성격은 매우 강렬해서 보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독립자금에 손을 댄 변절자를 두들겨 패기도 했고, 일본 판사를 "자네"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도 있습니다. 그녀는 비록 힘없는 서민이었지만 평등사상을 가지고 일제의 강압에 맞서던 여장부였습니다. 먼저 동거를 하자고 할 정도로 자유주의자였고 일제의 혹독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는 아나키스트였습니다. 고작 스물세 살에 죽은 후에도 보복 차원에서 시신 확인이 거부되었습니다. 군국주의에 맞서 평화를 원했던 그녀는 죽음마저도 혹독했습니다. 일제의 감시 속에 겨우 남편의 고향인 문경에 묻힐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독립투사 중 한 명인 것입니다.


박상언 기자 / 입력 : 2019년 0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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